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이 시로 (문단 편집) ==== 진실 ==== 그런데 2014년 1월 [[교토대]] 의학부 도서관에서 발견된 1960년 2월 콜레라균 연구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논문에 '''지도교수로 이시이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 종전 이후 사망하기 직전까지 자국에서 의학계의 원로로 대접받으면서, '''731 부대의 반인륜적인 행위로 얻어진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학계에 적용시켰던 것'''으로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즉 위의 '''[[피해자 코스프레|매음굴 운영과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는 정보]]는 이시이가 여전히 의학계에서 떵떵거리고 있는 사실을 외부에 은폐시키기 위한 역정보였던 것이다.''' 731 부대에는 일본의 최고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의사나 과학자가 다수 있었고, 이들은 전쟁 후에 전범 기소를 받지 않은 채 각 대학으로 돌아가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86년에 폭로된 약해 에이즈 사건(薬害エイズ事件)[* 혈우병 환자들의 치료약에 [[에이즈]]에 오염된 혈액제제가 사용되어, 그 약을 복용한 혈우병 환자가 에이즈로 사망하는 일이 속출한 사건. ]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녹십자 제약회사의 설립자·대표 이사·전무 이사는 시로의 최측근이었던 나이토 료이치(内藤良一, 1906~1982)였으며, 그는 제2대 731 부대장을 역임한 바 있는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 참고로 기타노는 녹십자 제약회사의 공동설립자이기도 했으며, [[1959년]]에는 녹십자의 전신인 일본혈액은행의 최고 이사이자 도쿄 공장 책임자가 되었고, 이시이 시로의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를 고문으로 두고 있어서, 731 부대와 그 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731 부대 관련자 중에 전범 처리된 사람도 거의 없고 그 극소수도 처벌은 극히 가벼웠다'''. 1945년 [[소련군]]은 [[만주 작전]] 때 이곳은 점령하고 731 부대 관련자를 체포하였지만 이미 수뇌부는 일본으로 튀었고 일부 스태프만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 넘겨졌으나 이들은 강제노역형을 살다가 소련-일본 수교 협상 때 모두 풀려나서 일본으로 돌아온다. 일본으로 도망친 [[731 부대]] 고위 관계자들은 승승장구했다. 모두가 그러지는 못했고 이시이의 함구하는 명령을 따라서 군인연금을 신청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소년병]] 같은 경우는 학력도 인정 못 받았다. 그런데 특히 '''교토대학 의대 학장을 지낸 인물도 731 부대 출신'''이라는 것은 [[충격과 공포]]. 그의 이름은 '''요시무라 히사토'''(吉村寿人). 이시이의 대학 후배이자 [[동상#s-2]] 연구를 했으며[* 이 인간의 동상 연구도 731 부대에서의 패륜적인 생체실험과 관련있을 지 모른다.실제로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그가 남긴것으로 추정되는 동산실험 기록이 박제되어있다.] 이후 교토대학 의학부 학장을 지냈다. 더구나 '''731 부대는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안전하게 귀국한 사람이 많은 만주 주둔 일본군 중에서도 인원 손실율이 특히 낮은 부대'''라는 점에서 더욱 사람의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외국에서만이 아니라 '''관동군 출신자들 사이에서도''' 비난이 쏟아질 정도. 심지어 그들의 전범 혐의 노출을 막기 위해 안전 철수를 명령하고 직접 편의를 봐주었던 관동군 참모장교조차 전후에 "'''내가 도와주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만큼 자기네 안전만 챙긴 놈들'''"이라며 비난해댔다. 여담으로 731 부대와 한국은 인체실험 희생자 외에도 의외의 분야에서 악연을 가지고 있다. 바로 [[유행성 출혈열]][* 한타 바이러스 및 서울 바이러스. 둘 다 1970년대 이후에야 발견되었다]의 매개와 감염 경로의 규명 과정으로 이는 731 부대 관련자가 미국군의 위탁을 받아 연구를 실시한 결과이다. 그러나 역시 치료법은 고사하고 병원체를 발견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저 기본적인 예방수칙 하나만 정리하는 데 성공한 정도이며 이 정도는 이미 미국군 중 상당수는 이런 예방수칙이 나오기 전에 어느 정도 기본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타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 출혈열은 미국 본토, 특히 '''서부의 풍토병'''이기도 하며 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이 병의 예방을 위해 쥐를 피하거나 보는 족족 죽이는 관습이 있었다. 한국전에서도 관련된 조치가 일선부대 병사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오히려 731 부대 관련자가 미국군에 협조했던 탓에 "중국과 북한 상대로 미국이 세균전을 벌였다!"는 공산권의 선전에 철저하게 말려들어 국제적으로 욕만 먹었고 지금도 계속 구설수에 오르고 있으니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다만 부분적으로는 실험했다는 징후도 있으나 구두증언밖에 없었고 증언 당사자가 [[중국군]]의 포로심문 과정에서 진술한 것이 전부로 거의 전원이 송환 후 이를 부정했다고 전해진다. 앞서 정리되었듯이 병원체를 규명하지도 못했는데 그 바이러스를 사용해서 세균전을 했다는 말이 이상하다. 쥐의 사체를 폭탄에 실어 투하했다는 기록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